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,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.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안토니오 비발디 (문단 편집) === 어린 시절 === [[1678년]] [[3월 4일]] 조반니 바티스타 비발디와 카밀라 갈리치오 사이에서 태어났으며, 그때부터 몸이 약했는지 [[칠삭둥이]][* 지진 때문에 일찍 태어났다고 하나 그때 [[베네치아]]에는 지진이 일어나지 않았다고 한다.(...)]가 얼마나 살까 했던 부모는 일단 집에서 급하게 세례를 한 후 정식적인 유아세례를 주지 않고 백 일을 넘겼는데, 비발디가 그 때까지 죽지 않자 [[5월 6일]]에야 [[세례성사|유아세례]]를 주었다고 한다. 유전인 [[적발]] 때문에 붙은 별명은 '붉은 사제(il Prete Rosso)'인데, 붉은 머리를 주변 사람들이 썩 좋게 보지 않았다고 한다. 왜 그런지는 [[적발]] 문서 참고. 비발디의 부모는 맏아들 안토니오를 포함해서 9남매를 낳았는데 현재 이름이 확인된 비발디의 형제는 안토니오 비발디를 포함해서 6명이다.[* 당시는 영아 사망율이 높은 시기였기 때문에 성장할 때까지 살아남은 형제가 6명이라고 볼 수 있다.] [[산 마르코 대성당]]의 바이올리니스트였던 아버지 조반니 비발디는[* 원래 조반니 비발디의 본업은 이발사였고 바이올린은 취미로 연주하는 수준이었다. 하지만 이발에 별 흥미가 없었는지 결혼 후에 바이올리니스트로 전업했다.] 맏아들 안토니오의 음악적 재능을 알아보고 그에게 바이올린을 가르쳤다. 또 안토니오가 12살이 된 무렵에는 자신의 상사였던 산마르코 성당의 음악감독이자 작곡가 조반니 레그렌치(Giovanni Legrenzi)에게 음악을 배우도록 했다.[* 다만 레그렌치는 비발디가 수업을 받기 시작한지 1년만에 사망했기 때문에 오랫동안 배우지는 못했다. 그의 첫 작품집 트리오소나타 Op.1에서는 레그렌치의 영향이 엿보인다.] 하지만 자신의 수입만으로 9남매를 키우기 힘들었던 조반니 비발디는 안토니오를 음악가 대신 [[가톨릭]] 사제로 만들기 위해 15살에 올레오 [[수도원]]에 입회시켰다.[* 당시 베네치아 공화국에서 사제는 수입과 안정성이 보장된 직장으로 인식되었기 때문에 자식이 많은 집안에서는 보통 아들 한 명을 수도원에 보내는 것이 관례처럼 되어 있었다. 다만 당시의 상황을 고려하더라도 굳이 맏아들을 사제로 만들려고 했던 것은 좀 이례적이긴 하다.] 비발디는 건강 때문에 수도원에서 기숙하지 않고 집에서 출퇴근 할 수 있도록 배려를 받았는데, 대신 비발디는 다른 사제 지망생들보다 오랫동안 수련을 받아야 했다. 비발디는 보통 6~7년 정도 걸리는 사제 수련 과정을 10년 만에 마치고 25살인 1703년 3월 23일에 사제 서품을 받았다. [[성품성사|사제 서품]]을 받았지만 사제로서 직무에 충실하지 않았고 일선 사목에도 신경도 쓰지 않았으며 바이올린 연주에 심취하거나 건강 문제를 핑계 삼아 [[미사]] 집전을 거르는 날이 많았다고 한다. 1706년부터는 아예 미사를 집전하지 않았다. 이정도면 면직당해도 이상하지 않고 변명도 필요없을 수준. 다만 몸이 약해서 미사 집전을 못했다는 비발디의 말을 비겁한 변명으로만 볼 수 없는 것이 하필 그가 앓고 있던 병이 천식이었기 때문이다. 비발디는 평상시에도 계속 기침을 해댔기 때문에 제대로 미사를 집전하기 힘들었고 실제로 그가 집전한 몇 번의 미사도 기침 때문에 큰 어려움을 겪었다. 결국 사제 본연의 업무를 하기 힘들었던 비발디는 자신의 음악적 재능을 본격 발휘할 다른 기회를 얻게 된다.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-BY-NC-SA 2.0 KR으로 배포하고,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.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.캡챠저장미리보기